이전 장에서, 우리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들을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는 지난번에 우리가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기위해

창조된 영적인 존재라는 성경의 주장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 아름다운 그림은 에덴 동산의 이야기에서 잘 묘사되어 있지요

하지만, 우리 세상을 둘러보면, 아름다움선함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실 정 반대이지요.

때문에 우리가 아마도 한번쯤 고민해봤을 다른 중요한 질문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 세상은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우리가 목격하는 모든 문제의

근원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 따라 해결책도 달라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관점은 무엇일까요?

Chapter 2

좋은 것의 타락

Chapter 2

좋은 것의 타락

인류와 인류의 많은 문제들에 대해 성경은 우리가 본질적으로 다음과 같기 때문이라고 평가합니다.

Chapter 2

좋은 것의 타락

창세기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 중 단연

가장 중요한
작품 입니다.


다른 어떤 창조물에게도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이러한 특권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특별한 관계는 그 특성상

하나님을 거절할 수 있는 선택 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자유의지와 사랑

하나님은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자유 의지를 가졌다는 것은 옳은 일을 할 수도 있고 그른 일을 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자유 의지를 가졌으면서도 그릇 행할 가능성은 전혀 없는 존재를 상상하는 이들도 있지만, 저로서는 그런 존재를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선해질 수 있는 자유가 있다면 악해질 수 있는 자유도 있는 법입니다. 악을 가능케 한 것은 바로 이 자유 의지 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사람들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을까요? 악을 가능케 하는 것도 자유 의지지만,
사랑이나 선이나 기쁨에 가치를 부여하는 유일한 것 또한 자유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자동기계—기계적으로 움직이는 피조물들—의 세계는 창조할 가치가 없습니다.

C.S. 루이스, 고통의 문제

죄송합니다. 네트워크 연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이 진정한 의미를 가지려면 저에게는 자유의지가 필요합니다.

오케이 주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줘.

예를 들어: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 자유의지로

어떠한 선택을 했습니까?

다음에 나오는 창세기 2장과 3장을 읽으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선악과가

도대체 뭐길래?

선악과에 대해 읽어볼 때 (창세기 2장 17절), 몇몇 사람들은 선악과가 하나님이 인간을 타락시키기 위해 계획한 함정이라고 상상을 합니다.

하지만 에덴 동산이 어땠는지 다시 떠올려 봅시다.

에덴 동산은

선인장과 모래 사막 한가운데

먹음직스러운 (하지만 금지된) 과일 나무 하나가 놓여 있는 황무지가 아니였습니다.

에덴 동산에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지천이였습니다.

선악과는 함정이 아니였습니다.

아마도 그 열매 자체는 특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열매는 실질적으로 아담과 하와가

창조주와의 관계를 거부할 수 있는

자유를 상징했습니다.

생각해보면, 모든 특별한 관계에는 그 관계의

선악과가 있습니다.

우정
배신
의무
탈영
결혼
간통

우리가 볼 수 있듯이, 의미있는 모든 관계에는 '선악과'가 있습니다.

여기서, 과일을 먹는 것은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이 행위를 크게 문제 삼은 것이 이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그 행위의 관계적 중요성입니다.

남편이 아내와 말다툼을 한 뒤에 아무 말 없이 아내에게 자신의 결혼 반지를 건네주고 집 밖으로 나갔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반지를 돌려주는, 겉보기에는 중립적인 이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나요?

비슷하게, 선악과를 따 먹는 것은 심각한 결과를 불러왔습니다. 과일 자체가 죄악스러워서가 아니라 이 행위에 담긴 의미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자신들의 창조주 그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으로써 거부한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과 창조주간의 상황을 누가복음 15장 11절-24절 탕자의 이야기에서 정확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배경 정보

예수님이 이 이야기를 하던 당시에 청중들은 매우 충격받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산은 사람이 죽었을 때에만 넘겨받었던 것이기 때문이지요. 아들이 자신의 유산을 아버지께 요청하던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를 요청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매우 모욕적이고 상처받는 요구였습니다.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에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상대방을 거절하고 배신했던 때를 떠올려보세요.

창세기 1장에서 본 사랑스러운 창조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인류는

자유의지의
존엄성을

부여받았습니다.

하지만 인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거부했습니다. 

누군가에게 거절 당하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사랑이 깊을수록 상처도 깊습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과 인류의 관계에서도 적용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창세기 3장 5절에서 뱀의 말을 들었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났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을 때 눈이 열리고 선과 악을 알게 되고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이런 매혹적인 제안은 아담과 하와가 금단의 열매인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하나님과 같이 선악을 결정할 수 있고


그리고 실질적으로

자신이 하나님이 된다는 말이였습니다.

나는 내 운명의 주인이요, 내 영혼의 선장일지니.

윌리엄 어네스트 헨리, "인빅터스"

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마틴 루터

죄란 자신이 스스로를 창조하고, 스스로를 의지하고, 스스로 지탱한다는 거짓말을 믿는 것입니다.

어거스틴

아담과 하와는 선택을 하였습니다.
이제부터

그 어떤 권위도


그들의 선과 악의 경계를 정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인 선택과 취향이 진리와 도덕성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하나님을 권위의 위치에서 제거하고,


그들 스스로가 자신의 "상관"이 된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의 운명을 자신 스스로의 지헤와 능력으로 지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이 왕위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다음

뒤로 넘어가기 전에 이 점을 생각해 보세요.

당신은 자신의 결정대로 살고 싶은 이런 욕망에 얼마나 공감할 수 있습니까?

이 영상에서 설명하는 주제들에 대해서 추가 자료를 읽고 싶으시다면 아래를 클릭해 주세요.

죄성이란 무엇일까요?

우리 식대로 말하자면 "제 영혼을 제 것으로 삼기"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된 삶을 살고 싶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실제로 우리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꼐 "여기는 당신 소관이 아니라 제 소관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을 우주 안에 한 구석이라도 얻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런 구석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C.S. 루이스, 고통의 문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에 균열이 가게 했을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인생에 비참한 결과들을 가져왔습니다. 그 결과들이 무엇인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다음 편에서 알아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