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우리는 인간이 처해있는 현실과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어떤 일을 시작 하셨는지를 다루었습니다.
우리의 바른 응답에 대하여 말하기 전에 구원에 관한 잘못된 이해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은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 스스로 살펴 보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
이와 같이 구원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바른 변화은 한 번의 말 몇 마디의 고백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결정을 내린 후에 뒤따라 오는 삶을 통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수양회에서 혹은 복음의 말씀을 듣고 고백하거나 기도하는 것이 진실된 구원의 좋은 시작일 수 있지만, 반면에 곧 지나갈 감정에 취해서 깊이 없는 말을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감정의 높낮이에 따라 진심이 아닌 말을 했던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한 고백이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하지 않거나, 예수님에게 순종하고 그에 동반하는 삶이 따르지 않는다면, 정말 진실된 결정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나는 모태 신앙으로 평생 기독교인으로 살았다.
다음 구절을 읽어보십시오.
로마서 3장 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사도행전 3장 19절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나는 성경이 말하는 모든 것을 믿는다.
하나님에 대한 지적인 이해 만으로는 구원을 받기에 부족합니다.
야고보서 2장 19절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는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영적인 존재로서 귀신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라던지 "예수님이 인간들의 죄를 위하여 돌아가셨다" 와 같은 말의 진실됨을 어느 사람들보다 더 확실하게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을때 이러한 지적인 믿음이 그들이 구원받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쉽게 동의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고 울었다
감정은 의미로울 수 있지만 구원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야고보서 2장 19절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야고보서 2장 19절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는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나는 나의 구원을 믿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많은 이들은 자신의 믿음을 의심하지 말라고 배워 왔기 때문에 자신의 믿음에 대한 확신이 구원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리새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당시 예수님 시대에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자신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틀렸습니다.
마태복음 23장 13-15절을 읽어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안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나는 교회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마태복음 7장 21-23절을 읽어보십시오.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 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나는 모태 신앙으로 평생 기독교인으로 살았다.
다음 구절을 읽어보십시오.
로마서 3장 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사도행전 3장 19절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나는 성경이 말하는 모든 것을 믿는다.
하나님에 대한 지적인 이해 만으로는 구원을 받기에 부족합니다.
야고보서 2장 19절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는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영적인 존재로서 귀신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라던지 "예수님이 인간들의 죄를 위하여 돌아가셨다" 와 같은 말의 진실됨을 어느 사람들보다 더 확실하게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을때 이러한 지적인 믿음이 그들이 구원받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쉽게 동의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고 울었다
감정은 의미로울 수 있지만 구원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야고보서 2장 19절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야고보서 2장 19절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는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나는 나의 구원을 믿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많은 이들은 자신의 믿음을 의심하지 말라고 배워 왔기 때문에 자신의 믿음에 대한 확신이 구원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리새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당시 예수님 시대에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자신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틀렸습니다.
마태복음 23장 13-15절을 읽어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안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나는 교회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마태복음 7장 21-23절을 읽어보십시오.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 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무엇보다도 성경에서는 구원을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설명합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은 구원을 이렇게 말합니다.
선물은 말 그대로 (한 일에 대한 댓가로 받는 것과는 다르게) 저희가 얻어 내거나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구원이라는 선물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행이나 종교적인 의식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선물은 단순히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선물'하면 우리는 주로 잘 포장된 물건을 떠올립니다. 내 것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물건 말이지요.
하지만, 구원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들고 가면 그만인 물건과 같은 것이 아니지요. 고아가 어떤 가족에게 입양되는 것과 같이 과분한 관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 관계의 선물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때,
이들은 구원을 가방 속에 찔러넣고 잊어 버리는 종이 조각과 같이 여기고 이전과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은 구원에 대한 잘못된 생각 중 하나입니다. 단순히 적합한 기도를 드리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지요.
'선물' 이라는 단어의 의미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물건 취급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면,
죄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부터 구원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되는 것이겠지요.
구원의 선물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선물입니다. 이는 관계의 선물로 청혼이나 혹은 자기를 향해 반감을 품은 자들까지도 사랑하는 자애로운 왕의 입양 제안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게 한 선물을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예수님의 의입니다.
작가 J.D 그리어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겪으셨다는 것이다.
내가 살아야 할 완벽한 삶을 사셨고, 내가 죽어야 할 죽음을 죽으셨다.
고린도후서 5:21
이 말하는 것은, 그가 실제로 나의 죄가 되심으로 말 그대로 내가 그의 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성 아타나시우스는 이것을
그는 나의 기록을 가지고 죽으셨고, 대신 자신의 기록을 내게 주셨다. 신학자들은
J.D. 그리어, 작가
더 읽으시려면 6장의 PDF 버전을 여기에서 찾으실 수 있습니다. 또한, 아래에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삶이 변화된 사람들의 경험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