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장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미천한 출생

성탄절 카드에 그려진 예수님의
탄생 장면은 포근한 분위기에
깨끗한 건초가 깔려있고, 노란색
광채로 싸여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상 예수님은 이 세상에 태어날 마땅한 곳조차 없는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누가복음 2장 4-7절에서는 예수님이
탄생하신 상황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아기를 출산하기에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하여 그들은 축사로 가야했고,
가축들이 먹은 음식물 쓰레기가 담긴
여물통은 아기를 받기위해 재빨리
비워져야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로 하신 방법입니다
- 더럽고 천박한 여물통에서 말이지요.

누가복음 2장 4-7절을 읽어보세요

이러한 세상의 구세주의 탄생을
이해하기 매우 어렵다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지실 것입니다.
구원자의 탄생이라고 하면
권력의 전당이나 왕들의 궁전,
또는 사람들이 대부분이 살고
싶은 곳을 떠올리는 것이
자연스러우니까요.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시선을 끌고
싶으시다면 무언가 대단하거나
인상적인 일을 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왜 예수님이
그렇게 천박한 장소에서 태어나셨는지
이해하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걷어붙인 소매

성경에 인간의 상태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이 심적 고통을 묘사한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이사야 59장 8-16절입니다.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행하는 곳에는 정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정의가 우리에게서 멀고 공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즉,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둠뿐이요, 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에
행하므로.

...정의를 바라나 없고,

구원을 바라나 우리에게서
멀도다.

이는 우리의 허물이 주의 앞에 심히 많으며,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언하오니.

...우리가 여호와를 배반하고
속였으며, 우리 하나님을 따르는
데에서 돌아섰으며,

...여호와께서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공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하나님이 인류의 문제에 개입할 사람이 없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하셨나요?

이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함을 알 수 있을까요?

죄의 순환고리 안에서 모든 인류는 피해자이자
가해자입니다. 우리는 남에게 죄를 짓고, 남이
지은 죄들에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소매를 걷어 붙이고 나타나셨습니다.

인간이 죄로 인하여 떨어진 깊이 만큼

하나님은 생각할 수 없을 만큼의 거리를
내려와 우리를 만나 주셨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구절이라고
할 수 있는 요한복음 3장 1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죄의 악순환에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그분의 아들 예수님 안에 자신을 담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저 따뜻한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육신하여
오심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자기를 제한하신 하나님"에 대해 더 읽어보기

시간을 초월하시는, 전능하신 창조주가
시공간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이 성육신이라고 하는 기적만으로도
놀랍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그리고
너무 믿기 어려워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인간이
놀라워 하는 일들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육신이시며, 역사상
가장 전지전능 존재였던 예수님이
가장 낮고 천한 죽음을 죽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정부가 최악의 범죄자에게만 가하는 처형수단인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정체가 사실이
아니었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그냥 또 다른 영웅의 죽음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자신에 대해 하신 주장이 사실이라면, 즉,
예수님께서 정말로 하나님의 성육신이라면, 우리는
곤란한 질문에 직면하게 됩니다.

죄의 대가

4장에서 배웠듯이, 죄는 실재하며, 신성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악행들을 간과하시거나 모른체 하시지 못하십니다.

다음
우리는 유죄입니다.

우리는 죄와 악을 실제로 목격할 때, 이에 상응하는 반응이 있어야 함을
알게 됩니다. 정의가 존재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유죄입니다.


우리는 지울 수 없는 잘못들을 저질렀습니다. 죄책감과 자책감을
지우려고 노력해도 이는 계속 우리를 짓누릅니다.


죄는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깁니다.


우리의 죄는 더 나아가 개인들,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우리 자신들의
영혼들을 일그러 뜨립니다. 우리는 무신경하고 잔인한 말들을 가볍게
내뱉고, 우리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잊은 채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살아갑니다.


하지만 아무일도 없었던 게 아닙니다.


우리가 뱉은 그 말들에 누군가는 평생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다음의 이야기들은 실제 이야기들이지만, 사생활 보호를 위하여 서술자가 나레이션을 하였습니다.
지울 수 없는 흔적

애들이 놀다가 이렇게 얘기하는 것을 가끔 들으셨을 겁니다: "이건 연습 게임이야."


어른인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동들이 마치 연습 게임처럼 세상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상상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음의 이야기들은 실제 이야기들이지만, 사생활 보호를 위하여 서술자가 나레이션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죄를 저지를 때 (크든 작든 상관없이 동일하게) 우리는 역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게 되고 세상의 도덕규범을 손상시킵니다.

우리가 죄들로 망가뜨리는 이 도덕규범은 하나님의 마음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들은 하나님의 지위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신성함을 모독하고, 창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에 맞서는 행위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의지라는 구조물의 파손이며, 그가 의도했던 도덕적
조경에 얼룩을 남기는 것입니다.

딜레마

시편 38장 3-4절

주의 진노로 말미암아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말미암아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로마서 6장 23절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값은 죽음입니다 - 단순히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
바로 하나님에게서 영원히 떨어져 나가는 것 말합니다.

우리는 죄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죄의 대가를 감당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를 감당하기가 너무 벅찹니다. 이 딜레마에 주목해 보세요. 우리는
비참한 두 가지 선택 사이에 놓였습니다: 우리의 죄들을 무시하시고
정의를 버리라고 하나님께 부탁드려야 할까요? 아니면 정의를
실현시키시고 죄인들을 없애 버리라고 부탁드려야 할까요?

놀라운 해결책

하나님은 놀라운 해결책을 내놓으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직접 죄의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자발적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서 죄의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강력한 정의의 증거이며, "죄의 삯은 죽음이라"는
성경의 주장을 실현하였고, 정의의 주춧돌을 세웠습니다. 동시에
십자가는 하나님의 자비의 강력한 표시로서,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줍니다.

용서의 대가

용서는 우리에게 대가 없이
주어지지만, 실제로는
공짜가 아닙니다.

누군가가 용서의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결혼 10년 만에 남편이 결혼생활 내내 계속
불륜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여성을
상상해 보세요.

그녀는 어떻게 하고 싶을까요? 남편이 혼자서 고통에 몸부림치길 바라면서, 그를 떠날까요? 그럴 만도 하겠지요.

하지만 그녀가 그를 용서하기로 결정했다고 해봅시다.

그녀는 아이들을 위해서, 그리고 어쩌면 지금 진정으로 미안해 하는 남편을 불쌍히 여기서 불가능한 일을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는 이중의 고통입니다. 우선 그녀는 배신을 당했습니다.
결혼식 날에 그들이 한 서약과, 그녀의 고생, 충실한 사랑과
희생의 모든 세월은 남편에 의해 짓밟혔습니다.

하지만 이제, 더 나아가 그녀는 이 남자를 용서해야 하는 짐을 떠안아야 합니다.

이는 마치 독을 삼키려는 것과 같습니다.

진정한 용서의 모든 행위에는 이렇게 대가가 있습니다.

일종의 죽음이지요.

용서의 진정한 대가를 이해한다면 감히 용서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고, 용서를 받았을 때 우리는 경외심과 감사에
휩싸일 것입니다.

분별이 없고, 도덕적으로 둔감한 우리가 때때로 우리의 죄에 대해 혐오와 수치로 반응한다면,

하나님의 완벽하게 순수하고 성스러운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더 영향을
받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그것을 흡수하겠다"고
말하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 대가를 치르겠다. 내가 그 모든 독과
인간의 모든 죄악의 쐐기풀을 내 몸에
흡수하겠다" .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하나님의 마음에 커다란 상처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려 세상의 죄를
떠맡으시고, 당신의 죄를 위한 희생양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죄는
하나님에 대적하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에 대한 위반과 모욕이며, 우리의 삶에 대한 그의 통치에 대해 반항적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죄는 진공상태에서 저지르는 것이 아니며, 우리 자신만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며, 심지어 우리
주변사람들만을 상대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죄는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아니고, 스스로
아름다운 삶을 실현하지 못하고, 우리가
바라던 사람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해 실망과
자책감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반항군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이며, 그를 외면한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한량없는 인자하심입니다.

우리가 손을 뻗어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줄을 손에 쥐는지의 여부는 우리가 이 사실을 얼마나 깨닫게 되었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

십자가는 우리이게 무엇을
보여주는가?

부모가 되면 새로운 두려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물론, 부모가 되기 전에도 세상은 위험하지만
아이가 생기면 세상은 정말 끔찍하게 위험해
집니다. 자신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란:


내가 사랑하는 이의 고통입니다.

젊은 여자의 차와 충돌하여 그 여자를 죽인 음주 운전자의 시나리오를 생각해보세요.

이 음주 운전자가 만약 슬픔에 빠져있는
죽은 여자의 부모에게 다가가 왜 이들이
그렇게 슬퍼하는지 물어본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실제로 그가 죽인 것은 그 여자이지, 부모가 아니지 않습니까?

십자가가 보여주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의
마음을 망가뜨립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인간의 죄는 하나님에게
그만큼의 고통을 안겨줍니다.

하나님은 모든 죄악된 행동에 개인적으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내 도덕적인 실패와
하나님이 무슨 관련이 있냐"는 질문은
십자가의 메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의 심각성

더 나아가, 십자가는 죄의 심각성을 보여줍니다.
신학자 존 스토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첫째, 우리의 죄는 너무나 끔찍한 것임이
분명하다. 십자가만큼 우리 죄의 심각성을
잘 드러내 주는 것이 없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우리의 불의를 의롭게 용서하는
방법이 그자신이 우리의 불의를 담당하는
법 밖에는 없다면,


우리의 불의는 실로 심각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이 사실들을 이해할 때만이 우리는 자기
의와 자기 만족을 벗어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절실하게 필요한 구세주로
여기고 의지할 수 있다. [...]

우리는 십자가가 우리를 위해 행해진 것으로
보기 전에, 십자가가 우리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보아야만 한다.

"십자가에서 자기 몫을 담당할 준비가 된 사람만이 그 은혜에서 자기 몫을 주장할 수 있다"고 캐논 피터 그린(Canon Peter Green)은 썼다."

존 스토트,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

십자가는 우리의 죄의 깊이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 15장 13절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요한1서 4장 9-10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예수님은 자기목숨을 내려놓으심으로서
우리를 향한 가장 큰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그는 자신을 미워하고 경멸하는 세상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바로 그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잠시 생각해보십시오:

당신은 하나님을 향해 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아십니까?
십자가가 어떻게 죄의 심각성을 보여줍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당신의 죄에 대해 무엇을 보여줍니까?

이것으로 제5장의 첫번째 부분을 마칩니다.

더 읽으시려면 5장의 PDF 버전을 여기서 찾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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